보한재 신숙주 선생 탄신 600돌 기념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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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한재 신숙주 선생 탄신 600돌 기념 재조명
  • 신인식
  • 승인 2017.12.07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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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식 진안 무주 장수 본부장

지난 10월 27일(금) 오전 10시~오후 18시까지 국립한글박물관 강당에서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한글박물관,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후원하고 한글학회와 고령신씨 대종회가 주최한 『보한재 신숙주 선생 나신 600돌 기념 학술대회』 가 한글학자, 일반인 및 학생, 고령신씨 후손 등 4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신숙주는 태종 17년 1417년에 전남 나주시 금안리에서 태어나 22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생원과 진사가 되었으며, 25세에 집현전 부수찬을 역임하였고, 27세때 서장관으로 뽑혀 사신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31세에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응교가 되었다. 36세에 수양대군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였다. 37세 때에는 승정원 동부승지에 42세에는 평안황해 양도 체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세조 5년(1459년) 그의 나이 43세때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44세에 강원함길도 도체철사에 임명되어 야인 정벌을 하였으며, 45세때 충청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북정록(北征錄)을 편찬 하였다. 세조 8년 그의 나이 46세에 영의정에 오르고 52세에 원상에 제수 됐다.

성종 2년(1471년) 55세때 영의정에 재차 임명되었으며, 세종 때 일본에 갔던 경험을 살려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편찬 했다. 58세때 동국통감을 편찬했으며, 국조보감, 경국대전, 국조오례의 등을 완성시켰다. 여러 나라의 음운 (音韻)에 밝았던 그는 여러 역서(譯書)를 편찬하고, 일본여진의 산천 요해(要害)를 표시한 지도를 만들었다. 영의정 재임 중 성종 6년(1475년) 59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이날 기조강연에서 이상규 박사는 신숙주 선생의 공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 평가했다.
첫째 세종의 훈민정음창제를 보필하면서 훈민정음 해례 제작에 크게 기여 했으며, 이를 활용한 방안으로 운회번역, 동국정운을 지어 동음과 홍무정운 역훈을 지어 한음의 표기를 통일하는데 주된 역할을 담당하였고 그뿐 아니라 여진어, 왜어의 지명 인명에 대한 외래어 표기까지 확장하여 제시한 인물이고, 둘째 중국과 북방 여진, 왜와의 교린분야에서 있어서도 탁월한 역량을 보여 1456년 평안도도체찰사로 여진 잔류 세력들의 침략을 방어하고 정벌 하여 관방을 평정하였으며, 야인 정벌광경을 시와 그림으로 그려 1456년에 야전 부시도(夜戰賦詩圖)를 남겼다. 1460년에는 강원, 평안, 함길도 도체찰사로 모련위 야인을 소탕하였으며, 1461년 북정록을 남기고, 왜와의 교린을 통해 해동제국기를 남겼다.
셋째 수비수어 방략에도 뛰어나 어제병장설 주해, 병서구결 등의 수비수어 전략을 위한 많은 저술도 남겼으며, 직접 북관인 강원 함길도의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넷째 정치적 판단과 능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이시애의 난의 평정과 계유정란의 평정을 이끌어내어 세조의 신뢰를 받은 가장 측근 인물이었다.
다섯째 중국 사신으로 가서 직접 시문을 창작하고,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에 친필서(1447년)와 팔준도부의 찬을 지어 문학과 서예 분야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감수성으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여섯째 역사 지리분야에서도 고려사절요 35권 편찬, 국조보감, 동국통감,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하거나 주도를 하였으며, 기주관으로서 세종실록, 세조 실록, 문종실록, 예종실록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기의 주요 임금들의 실록 작성에 참여하고, 일본 여진의 중요 지역을 표시한 일본여진산천요해도설(日本女眞山川要害圖說)을 만들기도 하였다.
일곱째 성리대전을 바탕으로 한 천체 천문학 연구에도 남다른 역량을 과시 하면서 농산축목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식의 진폭을 보여주고 있다.
여덟째 성리학의 실천적 목표인 예악에 대해서도 예기대문언독, 국조오례 의의 개찬·산정(刪定)을 위임받아 완성시켰다.
성종이후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부각시키고 폄하 했으나 박현모 교수는 신숙주는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죽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담당했던 사명감이 투철했던 관료였고, 외교현장에 나가서는 상대방 수준에 맞는 수단을 적절히 구사할 수 있는 탁월한 협상가였다. 그는 또한 온순한 얼굴로, 풍자와 비유로써 옹의 마음을 일깨워 움직이게 하면서도, 일의 성과가 나온 다음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지혜로운 재상이었다고 평했다.
결론적으로 조선중기의 사상적 조류와 중후기에 나타난 변화의 흐름을 제대 로 인식한 다음 당대적 관점에서 재평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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