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배/논설위원
1987년은 민주화 원년이다. 독재 권력에 맞서 민주혁명을 이루고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당연한 평가다. ‘항쟁’에 가려 잘 보이진 않지만 ‘절제와 냉철’이 있었기에 더 위대하다. 지배 권력을 향한 분노에 편승해 제헌의회, 민중민주 주장까지 분출했지만, 국민은 자유민주주의와 대의 정치(代議政治) 강화를 선택하고 거기서 멈췄다. 그 결정체가 현행 헌법이다.
개헌보다 정치 개혁이 급하다. 정치 진입 장벽을 낮추고, 정치 극단주의를 막을 방안을 찾아야 한다. 선거구제 개편이 대안이다. 선거법 개정만으로 가능하다.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및 지방의원 선거를 중·대 선거구제로 바꾸거나, 소선거구제 유지 땐 결선투표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잘되면 대통령 결선투표 ‘해석 개헌’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국회, 특히 여당이 제 역할을 함으로써 3권분립이 제대로 작동되게 하면 된다.
그런데 헌법 시행과 함께 개헌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당시 직선제 개헌은 국민적 염원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5년 단임제가 상징하듯 ‘1노 3김’의 합작품이다. 첫 대선·총선 직후부터 이들의 정략이 교차하면서 1990년 3당 합당 때 ‘내각제 각서’ 파동이 있었다. 1997년 DJP 연합의 고리 역시 내각제 개헌이었다. 그 뒤에도 국회의장이 바뀔 때마다 이런저런 개헌 기구들이 만들어졌고, 지금도 국회 개헌특위가 활동 중이다.
개헌 논의를 하려면 통일이 가시권에 들어왔을 때 적용을 전제로 ‘통일헌법’을 준비하는 게 낫다. 기왕 연방제였던 독일은 서독 기본법으로 통일을 이뤄냈지만, 남북한은 체제 및 경제력 차이까지 훨씬 큰 만큼 난해한 문제가 많을 것이다.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은 않고 헌법만 탓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다음은 선거 주기 문제다. 대통령 임기는 5년, 국회의원 등은 4년이라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은 ‘단발 개헌’도 제안했었다. 그러나 국민 정치의식과 국가 역량을 무시하는 발상이다. 연방제인 독일은 지방마다 선거 시기가 달라 상시 선거 시스템이라고 할 만하다. 자주 하다 보면 여야 모두 항상 긴장된 상태여서 국정에 도움이 되는 측면도 많다고 한다.
가장 큰 개헌 명분은 ‘제왕적 대통령’ 방지다. 대통령 권한이 너무 커 남용하게 되니 ‘분권형 대통령제’, 또는 승자독식으로 정치 대결 구도를 격화시키니 ‘내각제’를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헌법 탓이 아니라 폐쇄적 국정운영과 권력형 비리 때문에 발생한다. 정상적 국정에 관한 한, 국회가 발목을 잡으면 대통령은 오히려 무기력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 배경이다. 현행 헌법으로도 ‘분권형’은 가능하다. 국회가 국무총리 임명 동의 권한만 엄격히 행사하면 된다. 그래도 미흡하면 임명 동의 대상을 확대하면 된다. 입법부의 행정부 견제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개헌을 해도 소용없다. 여당이 청와대 거수기에서 벗어날 때 제왕적 대통령도 사라진다.
헌법에 여러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제도도 완벽할 수는 없다. 이상주의적 헌법으로 여겨졌던 바이마르 헌법이 아돌프 히틀러에게 길을 열어준 것만 봐도 그렇다. 개헌에는 엄청난 국가적 에너지가 투입되고, 국론 분열의 폭탄이 될 수도 있다. 가능하면 운용의 묘를 살리면서 제헌의회 자유민주주의 대의정치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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