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천, 그는 왜 스스로 함거에 올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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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천, 그는 왜 스스로 함거에 올랐나?
  • 엄범희 기자
  • 승인 2011.05.19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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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천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지난해 전북지사 선거에서 공약한 LH공사 전북 유치가 실패한 데 대해 책임을 지고 스스로 함거에 올랐다.

‘망국적인 지역장벽 극복을 위해 LH공사 전북 유치에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전제하고, ‘공약을 지키지 못한 잘못에 대해, 지역장벽을 더 심화시킨 결과에 대해 도민들께 석고대죄를 청한다’고 함거에 오르는 소회를 밝혔다.

사실 선거에서 당선된 후보도 공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이 허다하다.

이런 현실에서 낙선한 후보가, 그것도 18.4%의 득표율낙선한 후보가 공약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겠다며 함거에 오르는 모습은 신선하면서도 한편으로 당혹스럽다.

그런 정치인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전 최고위원을 아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는 평생에 걸쳐 신뢰와 소통의 삶을 살았고,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도민과의 약속은 무엇보다 소중했고,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함거에 올랐다.

그가 인생의 멘토로 삼은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 정신을 교훈삼아 자신을 버림으로써 도민들게 석고대죄를 청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동을 옮긴 것이다.

그의 지난 인생에서는 이같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농민과의 소통을 위해 5년 5개월 동안 비닐하우스에서 생활

해남에서 키위를 재배하던 시절, 정 전 최고위원은 재배농민을 조직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 막 도입된 키위인 만큼 재배농민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야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농민들은 연령 학력 재산 등 모든 면에서 층이 다양했고, 특히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자신들과 다른 부류라 생각되면 마음을 열지 않았다. 서울에서 명문대를 졸업하고 내려온 정 전 최고위원을 농민들은 믿지 않았다.

고심 끝에 그는 농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농민 속으로 파고 들어 동질감을 형성하고 신뢰를 받아야 조직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하에 정 전 최고위원은 농장 옆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그 속에서 생활했다.

농민보다 더 어려운 생활을 자청함으로써 진정성을 보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신뢰를 얻고자 한 것이었다.
5년 5개월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그렇게 생활하자 농민들은 비로소 그를 지도자로 믿고 따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 수입 개방의 위기도 오히려 기회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1989년 정부는 키위를 개방 품목에 포함시켜 이듬해부터 수입을 개방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재배농가에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과 같은 조치였다.

그러나 정 전 최고위원은 농민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전국키위협회를 창립, 3천여 재배농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았다.

그 힘을 바탕으로 수입 키위와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수출국 대표와 담판을 벌여 유통시기를 조절하는 한편, 서울의 백화점에서 농민 직판행사를 벌이는 등 새로운 유통시스템을 구축했다.

300여 농민들이 출자한 농민 주식회사 참다래 유통사업단을 설립해 생산에서 저장 유통 가공 판매까지 모든 과정을 일원화, 농업경영의 새로운 모델을 창출했다.

수입개방후 똑같은 운명의 바나나,파인이플 수백만평이 사라졌는데 키위는 그의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수입 개방의 위기를 딛고 오늘날의 참다래 산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
 

5년 5개월 동안 비닐하우스 생활을 자청하며 형성한 농민 신뢰가 밑바탕이 됐다.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시위 현장으로 달려가

이명박 정부 출범시 농식품부 장관으로 발탁된 정 전 최고위원은 취임 한달여 만에 광우병 파동을 맞았다.

촛불정국의 위기상황에서도 정 전 최고위원은 소통을 생각했다.

누군가가 나서 진정성을 가지고 시위대와 대화해야 격앙된 국민감정을 가라앉히고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촛불시위가 극에 달했던 6월 10일, 정 전 최고위원은 혈혈단신으로 광화문 시위 현장을 찾아갔다.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른다며 모두가 붙잡고 만류했지만, 국민과 소통하지 않고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갔다.

시위대에 가로막혀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용기있는 행동은 정부의 진정성을 알려 시위가 진화단계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6월 27일 대전의 농관원을 방문할 때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정 전 최고위원의 방문을 용납할 수 없다며 시위대가 정문을 가로막고 시위를 벌였다. 관계자는 시위대를 피해 후문으로 들어갈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시위대와 실랑이가 벌어져 안경이 깨지고 양복이 찢어지는 불상사를 당하면서도 정정당당하게 정문을 통해 들어갔다.

회의를 마치고 나올 때에도 시위대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대화를 제의했다.

대화에 응하면 격의 없이 임하겠지만, 거절하면 경찰을 동원해 물리적으로 해산시킬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결국 대화는 받아들여졌고, 그는 와이셔츠 차림으로 한 시간 넘게 정부의 입장을 설명했다.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다.

대화가 끝나갈 무렵 한 아이가 달려와 그에게 계란을 하나 건네주었다. 던지려고 가져 왔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면 시위대 속의 한 아주머니가 선물로 건네준 것이었다.

그는 그 계란을 박제로 만들어 대화와 소통의 상징으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촛불의 위기를 기회삼아 둔갑판매방지법인 원산지표시제를 전면시행함으로서 다 망한다던 축산농가를 살려낸일도 알려지지않은 사실이다

-지역장벽을 허물고 소통의 길을 내고자 전북지사 선거에 출마

정 전 최고위원은 지난해 전북지사 선거에 출마했다. 그의 표현대로 ‘250석의 선출직 의석 중 단 한 석이 없는 집권여당의 후보’로 나섰다.

그런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신념이 있었다. 지난 30년간 국가 발전의 장애가 되어온 지역장벽, 망국적인 지역장벽의 벽을 허물고 소통의 길을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믿어 주겠는가? 선거철이 되면 왔다가 끝나면 돌아가는 철새라는 것이 집권여당 후보에 대한 도민들의 인식이었다.

그런 인식을 바꾸고 진정성을 알리기 위해서는 도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실질적인 행동이 필요했다.

고심 끝에 그는 아내를 설득했다. 교직을 그만두고 함께 내려가자고 설득했다.

그가 농업의 외길을 걸었다면 아내는 교직의 외길을 걸었다.

그와 결혼하기 전부터 27년 동안 교직을 천직으로 알고 생활한 아내였다.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 그의 아내라는 이유로 온갖 모욕과 질시를 받으면서도 끝내 지켜낸 교직이었다.

그런 교직을 선거를 위해, 그것도 떨어질 게 불보듯 뻔한 선거를 위해 버리라니…… 아내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도민들에게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는 실질적인 행동이었다.

-정 전 최고위원은 케네디 대통령이 말한 정치인의 4가지 덕목

역사적 방향 설정, 용기, 성실과 신념, 희생과 헌신 - 을 인용해 아내를 설득했다.

희생과 헌신의 모습을 보여야 도민들이 믿고 지지해 줄 것이라며 아내에게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가 되어 줄 것을 부탁했다. 처음에는 망설이던 아내도 그의 진정성에 감화되어 평생을 지켜온 교직을 버리고 함께 동행했다.

이러한 신념과 진정성을 바탕으로 그는 선거 기간 내내 중앙과 정부, 여당과 야당, 동과 서가 함께 가는 쌍발통 시대를 주창했고, 도민들 또한 그의 진정성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지율이 6~7%에 불과했지만 투표 결과 18.4% 전주에서는 23.59%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수십년동안 한자리숫자 지지밖에 얻지 못했던 황무지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언론에서도 소통의 물꼬를 텄다며 그의 선전을 높이 평가했다.

-도민과의 공약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고자 스스로 함거에 올라

선거 당시 정 전 최고위원이 LH공사의 일괄유치를 핵심공약으로 내세운 것도 지역장벽 극복을 위해서였다.

새로운 지역갈등의 현안으로 떠오른 LH공사를 그동안 소외만 받아온 전북으로 유치한다면 도민들이 지역장벽의 한을 풀고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당락에 관계 없이, 정치생명을 걸고 일괄유치하겠다 공약했고, 공약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8.4%의 지지를 바탕으로 집권여당의 최고위원이 되어 당위성을 역설했다.

핵심인사를 두루 만나 두번 세번 요청했고, 대통령에게도 간곡히 부탁했다.

30년 지역장벽의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새롭게 전개되는 서해안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LH공사는 반드시 전북으로 이전해야 한다,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그러나 정부의 진주 이전 결정으로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고, 오히려 지역장벽을 더 심화시킨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로서는 참담하고 비통했을 것이다. 아울러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위기상황에서 그는 또다시 신뢰를 선택했다. 인생의 주요 고비마다 그랬던 것처럼 ‘사즉생’의 길을 택했다. 스스로 함거에 올라 자신을 버림으로써 도민들게 석고대죄를 청하는 용기있는 행동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가 오른 함거는 어쩌면 그에 대한 또다른 시험대인지도 모른다. /엄범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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