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6년 역사 장수향교 지킨 충복 정경손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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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년 역사 장수향교 지킨 충복 정경손 공
  •  신인식 기자
  • 승인 2023.10.11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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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교직 신분으로
홀로 성전에 남아 왜적을 호령

늠름한 기상·충성심에 왜장도 감복
전쟁 중 건물 소실 無 현재까지보존

의로운 충절 후대에 길이 칭송 받아 
매년 음력 3월15일 제례 봉행 거행
장수향교 육동수 전교
장수향교 육동수 전교

 

61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장수향교(전교 육동수)에서는 2023년도에 명륜대학과 향교 인문학 강의 및 일요학교, 충효교실을 운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으며 장수향교의 발전방안을 찾기 위해 7월에 성균관 최수종 관장님 참여하에 봉심 고유제를 봉행했고 오는 20일에는 나주향교를 답사할 계획에 있다. 금년 12월 13일에는 장수향교와 정경손 학술 세미나를 개최할 계획이며, 또 전국 16개 향교와 연대해 세계 문화유산 등재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할 계획이다.    편집자주


전국 최고를 자랑하는 장수향교는 우리나라의 학문, 향교 역사, 문화적인 가치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나 정유재란 때 소실될 위기도 있었다. 그러나 낮은 신분의 한 사람이 모든 가치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큰 역사의 행적을 남겼으니 그 이름 ‘충복(忠僕) 정경손(丁敬孫)’이다.

장수향교 대성전(보물272호)
장수향교 대성전(보물272호)

 

■왜적이 감복한 충복 정경손(丁敬孫)

임진왜란 당시를 돌이켜 보면 높은 관직에 있어 많은 국록을 받고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고관대작들까지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쳐버려 나라의 운명이나 백성의 안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무능하고 부패한 관료들의 무책임한 행동을 무수히 들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맡은바 직분을 완수하는 것은 충실하다 이르고 응분의 책임을 다할 것을 권장했으며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을 다하는 사람을 칭송해 포양 함을 아끼지 않았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의 사정을 살펴보면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었으니 장수를 지켜 왜적이 침범하지 못하게 막는 의병장 최경회(崔慶會) 장군이 진주성에서 순절한 후 우리 고장 장수는 무방비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전라도의 관문인 남원성을 침공하기 위해서 진격하는 왜적은 거침없이 육십령을 넘어 싸움 한번 없이 장수 땅을 통과했으니 장수 현감이나 우리 고장을 지키던 관군들도 도망쳐버렸기 때문에 왜적들은 무인지경으로 날뛰고 약탈을 일삼고 행패를 일삼았다. 
이런 경황에도 불과 교직(校直)의 신분으로서 목숨을 돌보지 않고 홀로 성전(聖殿)에 남아 왜적의 출입을 금하는 소임을 다하는 용감성을 보인 정(丁)공의 자세는 범인(凡人)의 자세를 초월한 위대함이 있었다. 이러한 전율의 담기(膽氣)와 용맹성으로서 양문의 가문에 태어났으면 권율, 이순신 장군에 못지않은 국가의 동량지재가 되지 않았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추상같은 의기(義氣)와 충성심에 감복한 적장이 오히려 이 성역에는 들어가지 말라 는 신표를 써서 정문에 붙여 줌으로써 장수향교 건물을 보전할 수 있었다. 장수 현감으로 부임한 정주석 공은 정경손의 충절을 조정에 장계로 올려 예조(禮曺)에 포양함과 동시에 우리나라 백성들이 가장 영예스럽게 생각하는 삼강록(三綱錄)의 충신 편에 수록함으로서 장수삼절(長水三節)로 추앙하게 됐다.
삼강록에는 <敬孫 姓丁校僕壬亂倭寇犯校官 敬孫伏於 廟陸終始不變 義之因給信標 聖殿賴安立碑致祭(경손 성정교복임란왜구범교관 경손복어 묘륙종시부변의지인급신표 성전뢰안립비치제)>
경손 성은 정씨이며 향교의 노복이었다. 임진란을 당해 왜적이 향교의 교궁을 침범했을 때 경손이 묘당의 계단에 엎드려 처음부터 끝까지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왜적이 의로운 사람이라 칭찬하고 따라서 신표를 주어 이로 말미암아 성전이 편했다. 비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유교를 국교로 하는 이조(李朝)에서는 국교의 상징인 향교를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며 유림을 중심으로 팔도에서 일어난 의병들에게 시달려 온 왜적들이 구국근왕(救國勤王) 정신의 총본산인 향교를 보고만 있을 리 만무했다.
성현들의 도의 교육에 의한 구국정신을 말쇄하는 방편으로 왜적들은 진주하는 고을마다 향교만은 반드시 불태워 버리는 것을 철칙으로 알았으니 장수향교를 본 왜적들이 여기로 몰려들었다. 가는 곳마다 유림이나 교직이 도망쳐버리고 빈 성전만 있었는데 장수향교만은 정문의 계단에 전복으로 정장한 정경손이 단정히 앉아 추상같은 호령을 했으니 “여기는 성전(聖殿)이니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꼭 들어가려거든 나를 죽이고 들라”라고 하는 공의 늠름한 기세와 그 담대하고 용감한 기풍에 금수와 같은 왜적들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휘하던 왜장은 공의 충성심과 늠름한 기상에 감복해 즉시 지필묵을 챙겨 “이 성역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글을 쓴 신표를 공에게 주었다. 이 글을 향교 정문에 붙여 놓은 후에는 왜병은 이것을 보고서 향교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유일하게 장수향교 건물만이 세상에 남아있게 됐다.
정경손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수호로 불타지 않고 보존할 수 있었으니 이조 건축사에 정수라 할 수 있는 팔포형(八包型) 맞배집이 우리에게 전승돼 오게 됐다. 

정경손 공의 비각
정경손 공의 비각

 

후세에 장수 현감 정주석 선생은 장수향교 앞에 ‘호성충복 정경손 수명비(護聖忠僕丁敬孫竪名婢)’를 세우고 다음의 글로서 찬양했다. <용사지란(龍蛇之亂) 만파동미(萬波同靡) 도도구사(滔滔救死) 의성무기(義聲無幾) 위회입교관(委會入校官) 당시광경(當時光景) 천일수림(天日雖臨) 오성지위(五聖之位) 기위차안(幾危且安) 이수지력(伊誰之力) 고충복정경손(古忠僕丁敬孫) 복우묘폐(伏于廟陛) 서사수호(誓死守護) 종시무변(終始無變) 름연의등(凜然毅騰) 항추상이난범칙무의(抗秋霜而難犯則無義) 왜적(倭的) 혹구병집지의(惑具秉執之義) 후래지왜(後來之倭) 물범지의(勿犯之意) 서신서이여(書信書以與) 오호(嗚呼) 천지간(天地間) 정진지기(正眞之氣) 재인이부굴칙(在人而不屈則) 당일충복지소수가적백만회사가부경흔(當日忠僕之素守可敵白萬淮師可不敬欣) 괴차로(愧此老) 백두부유(白頭腐儒) 종무성이지공 (終無成已之功) 감격어기의(感激於基義) 금어수명전후외이망기사졸자실근식(今於竪名傳後猥以忘其辭拙者實謹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만가지 파도와 같이 흐트러져 모두 다 죽음을 구하고자 했으나 의로운 소리 어찌 없었으리오. 왜적의 우두머리 향교의 궁내에 들어왔으니 당시의 광경을 보면 하늘에 햇님이 조림하고 있으나 다섯 성인의 위패가 위태롭다가 편안하게 됐으니 이것이 누구의 힘이런가 옛 충복 정경손이 사당의 뜰에 엎드려 죽음을 맹세하고 수호했으니 끝까지 변이 없었고, 늠름하고 떳떳한 담기로 추상과 같이 항거해 숨 막히는 의기를 범하기 어려웠다. 그 의기의 집요함에 감동돼 뒤에 오는 왜적들에게 범하지 말라는 뜻의 서신을 써 주었다.
오호라 천지간에 굳고 참된 지운이 있어 사람으로 해금 굴복하지 못하게 한 것인즉 당일 충복이 깨끗하게 지킴은 가히 백만의 대군을 대적할만하니 어찌 존경하지 않으리오. 부끄럽도다. 이 늙은이 흰머리의 썩은 선비로서 지금까지 나의 공을 이루지 못했음이로다.
그 의로움에 감격해 지금 여기에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하고자 하니 외람됨으로써 그 말을 잃어버려 옹졸하게 됐으나 사실을 모아 삼가 이 글을 적었노라.)

왜장이 쓴 신표(본성역물범)
왜장이 쓴 신표(본성역물범)

 

이 비석을 세움과 동시에 장수삼절(長水三節)로서 의암 주 논개 순의리와 더불어 ‘호성충복 정경손 공’이 추앙됐다. 공의 이름은 경손(敬孫)이며 성은 정(丁)씨 이고 관향은 창원(昌原)이다. 선조는 중국 당나라에 살았는데 853년(新羅 문성왕 15년 발해 성화 24년 계유)에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로 들어왔으며 휘 연방(衍邦)은 고려국의 대호군(大護軍)의 벼슬에 올랐고 휘 환문(煥文)은 도사(都事)의 벼슬에 올라 고려 초부터 말엽까지 명문가를 이룩해 혁혁한 양반의 가문이었다. 
그러나 공의 연대에 와서 천역(賤役)으로 신분을 격하시킨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짐작하건대 이성계(李成桂)의 반정에 항거하던 고려의 수절신 (守節臣)의 후손이거나 이조에서 고려의 명관들을 유배시켜 배소에서 죽게 했으니 그 후손들이 갈 곳이라고는 이러한 천역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해간 양반 가문의 후예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공은 기구한 운명의 장난으로 장수향교의 교직이라는 천역을 감수하고 성묘(聖廟)를 지키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충실히 책임을 완수했다.
장수가 낳은 문장가 손암(巽庵) 유위(柳偉) 선생은 정경손 공의 충절과 의기를 아래와 같은 절구(絶句)를 지어 읊었다.
<병겁란이인사궁(兵劫亂離人事窮) 유수호성수양관(有誰護聖守痒官) 경초질풍정복재(勁草疾風丁僕在) 포양한지호장공(褒揚恨止戶長公)>
(전쟁이나 난리가 나면 인사마저 궁한데 누가 있어 성현의 위패와 향교를 지킬까. 거센 바람에도 지조 굽히지 않은 정충복이 있었으니 호장으로 포상해 한마저 그쳤더라)

 

정경손 공의 제례
정경손 공의 제례

 

정(丁)공은 왜란이 끝난 후 장수현의 호장으로 발탁돼 그 공을 포상받았으며, 군민의 존경을 받으며 여생을 마쳤다. 수명비각은 1976년 장수향교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장수향교 정문인 부강문 (扶綱門)의 좌편에 이건 돼 새롭게 단장됐고 정경손 공은 영혼이 돼 400여년을 넘기까지 장수향교를 수호하고 있으니 몇천년이 돼도 정경손 공의 충절의 영혼은 민몰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육동수 전교는 “정경손 공의 후손이 당시 천역의 신분이라 그동안 드러나지 않다가 신분 계급이 철폐되고 시대가 변화됨에 따라 그 후손으로 최근에 나타난 정치상 씨는 어렸을 때 장수향교 옆에 살다가 서울로 이사 갔으며 어른들께서 정경손 공이 우리 집안 선조라고 구전돼 오고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하며 “음력 3월15일 정경손 공의 제례 봉행 시 함께 참관 분향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울러 유림과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은 이런 훌륭한 일을 하신 공을 기리기 위해 유택이라도 마련해 주는 일은 물론 공의 추모 사당과 제실 및 동상이라도 건립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라고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정경손 공의 후손 분향
정경손 공의 후손 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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