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년만에 다시 오른 천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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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년만에 다시 오른 천왕봉
  • 엄범희 기자
  • 승인 2011.12.27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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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태야, 드디어 천왕봉 정상이다!”
“야호! 11 년 만에 다시 정상을 정복했구나. 친구들아, 정말 고마워!”

순백이 온 산야를 뒤덮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나는 포효하듯 소리를 질렀다. 11번째의 정복이었다. 그리고 실명 후 6번째의 짜릿한 감격이었다.

이번 등정은 한국산악회 경남지부와 전북지부의 우정의 합동산행이었다. 전북과 경남지부장간의 두터운 신뢰와 결속으로 마련된 이번 산행에는 양지부에서 각각 4 명씩 참석했다.

우리는 어제 경남지부에서 마련한 끈끈한 우정과 활기 넘친 친교의 시간을 갖은 후, 오늘 아침 8시 30분에 백무동 산장을 나섰다. 천왕봉의 알싸한 기운이 이곳까지 내뻗치고 있었다.

나는 최낙관 예원 예술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장의 배낭을 오른손으로 붙잡고 왼손엔 스틱을 짚으며 가파른 바위 구간을 한발 한발 조심스레 떼기 시작했다.

“경태야, 계속 바위 구간이야, 발목 조심해.”
“야, 초장부터 골탕 먹이네. 좀 천천히 가자.”
산행은 처음부터 만만치 않았고, 나는 앞으로 펼쳐질 행군이 여간 고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나는 30 년 전, 대학 2 학년 여름방학을 맞아 학우 3 명과 함께 이 코스를 처음 밟았었다. 험한 바위 코스를 오르다 중간지점에서 장대비를 만나 생쥐 새끼마냥 초라한 몰골로 추위와 사투를 벌이며 올랐던 영원히 잊지 못할 고난의 추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그 시절엔 요즘처럼 최첨단 기능성 장비가 없었다. 기껏해야 교련복에 군용워커, 검은 베레모자가 전부였다. 게다가 짐은 얼마나 무거웠던지. 무거운 석유버너에 꽁치통조림, 석유와 알코올통, 그리고 천막집에서 맞춘 무거운 텐트와 쇠파이프 뽈대, 카시미론 담요까지,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올랐을까 싶다. 모두 아련한 추억들이다.

옛적 빛바랜 사진을 생각하며 가파른 바위구간을 걷고 있는데 오른쪽에서 세파에 찌들었던 마음의 상처를 깨끗하게 씻겨주는 시원한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신라의 화랑도들이 적진을 향해 힘찬 말발굽소리를 내며 달려가는 것처럼 기백 넘치게 들려왔다.

“낙관아, 계곡인가 봐?”
어제 과음 탓에 혼미해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호박도덩이구간과 바위계단구간이 서로 잘났다고 엎치락 뒷치락 거리며 이어지더니 계곡물 소리도 어느새 끊겼다.

하동바위를 지나 지루한 바위코스가 이어졌다. 얼마를 왔을까. 온 계곡을 쩌렁쩌렁 울리는 우렁찬 계곡물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한 소리였다.

“갱태야, 쉬어가자. 바위에 앉거라.”
“예, 행님 예. 고맙심더.”
최재일 경남지부장님이 친형님처럼 자상하게 나를 평편한 바위에 앉혀주었다.

“경태씨, 치즈젤린데 아 해.”
“오케이, 누나 고마워..”
우렁찬 계곡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데 친누나처럼 인자하고 인심 후덕한 경남지부 소속 정재은 누나가 꿀맛같이 달콤한 치즈젤리와 육포를 입에 넣어 주었다.

꿀맛 같은 휴식에 일어날 생각도 안하고 넋 놓고 있는데 최병선 전북지부장이 나의 흐트러진 정신 줄을 잡아 당겨주었다.
“경태야, 지금부터 내가 안내할게.”
“고마워!.”

사실 나는 어제 폭음한 탓에 오늘 산행을 포기하려했었다. 늦잠자고 일어나는데 두 다리가 이미 풀려있고 숙취가 심해 이 상태로는 산행은 무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8 명의 천사들이 분에 넘치게 헌신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쉽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지긋지긋한 돌무더기와 단단한 바위가 계속 이어졌다. 솜털처럼 푹신푹신한 길이 아니더라도 좋다. 제발 흙길이 나타나기만을 나는 기다렸다.
“갱태야, 출렁다리다.”
“야호, 이제 살았다.

나는 발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돌멩이 밟기행보가 잠시 끝났다는 최 지부장님의 축복의 메세지를 듣자 희열의 환호성을 질렀다. 뒤따라오던 최 지부장님은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다리위에서 계속 발을 굴렀다. 심하게 요동치는 출렁다리는 마치 청룡열차를 탄 것 마냥 짜릿한 쾌감을 선사해 주었다.

다리 중간쯤에 다다르자 출렁거림은 더욱 심해졌다. 마치 3 년 전의 남극탐험을 위해 탐험선을 타고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질러 악명 높은 드레이크해협을 항해 할 때와도 같았다. 그때 선실의 침대에 누워있는 내 몸은 마치 공중부양 하듯 파도에 요동쳤는데 지금이 꼭 그 느낌이었다.

“어메, 어지러워라. 그만 해요. 하하하.”
나는 잠시 동심에 빠져 천진난만한 개구쟁이가 되었다. 힘들 때엔 이런 함박웃음이 에너지를 보충해주는 청량제 역할을 톡톡히 해 준다.

잠시 행복했던 출렁다리 건너기가 끝나자 다시 큼지막한 돌무더기 구간과 바위 계단들이 계속 이어졌다. 나는 온정신을 양 발끝에 집중하며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자의 포효 같은 강력한 음성이 고막을 때렸다.
“경태야, 머리 조심해. 바위야.”

그동안 나는 산행을 하면서 등산로를 가로지르는 나무에 숱하게 머리를 부딪쳐 왔다. 그러나 바위와 충돌한 적은 없었다.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 지는 일이다. 나는 순간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추며 걸었다.
잠시 후 왼쪽에서 거센 계곡물소리가 들려왔다.

4 년 전, 중국고비 사막을 달릴 때 협곡구간을 통과하는데 아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천리 길 절벽 아래 거친 물살이 흐르고 있다는 도우미의 말에 나는 들리지도 않은 주최 측에게 소새끼, 개새끼 하며 욕을 마구 해댔었다.

그때 나는 마치 천국행 외나무 다리 아래 사탄들이 고개를 삐죽 내밀며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태세로 우글거리고 있는 것 같은 상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지옥의 코스였다.

지금 참 아찔한 기억이다. 나는 상어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듯한 계곡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초 긴장상태에서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등줄기에선 한일자를 그리며 자꾸만 땀이 흐르고 있었다.

“갱태야, 시원한 약수물이다 묵어라.”
뒤에서 나의 안전을 지켜주시며 따라오시던 최 지부장님이 어느새 앞서왔는지 감로수와 같이 시원한 약수물을 바가지에 받아 주셨다.
“땡큐 땡땡큐, 행님에 고맙심더. 열심히 묵고 무럭무럭 크겠심더. 하하하.”

나는 단숨에 바가지를 비웠다.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쉬는 참에 나는 사랑하는 아내가 싸준 방울토마토를 일행들 앞에 내놓았다.
“자, 방울토마토를 무료로 드립니다. 어서어서 맘껏 집어 가시소.”

그것은 사실 인심도 쓸겸 배낭의 무게를 좀 덜어보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방울토마토는 순식간에 동이 났다. 나의 작전은 성공했다. 나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빈 그릇을 배낭에 챙겨 넣었다. 우리는 참샘에서 잠시 행복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경태야, 바위에 눈이 쌓여 미끄럽다. 조심해라.”
내 뒤를 바짝 붙어 오던 최 교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주의를 환기 시켜 주었다.
“고마워, 친구야! 올 들어 처음 만난 눈이네.”

완만한 지형이 갑자기 가파른 지형모드로 바뀌었다. 이곳은 30 년 전 그리고 21 년 전에 두 다리가 풀리고 체력이 극도로 소진되어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갔던 고난의 코스요 마의 구간이 아니던가.

갑자기 등줄기가 싸하면서 온몸이 굳어진 느낌이 들었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나는 기분 좋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눈 위로 굴러 천만 다행이었다. 11 년 전 고난의 행군을 펼쳤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땐 천왕봉을 찍고 허리까지 빠지는 눈 속을 헤메며 하산하던 구간이라 별 고통은 못 느꼈다. 배낭스키를 타고 룰루랄라 콧노래 부르며 신나게 내려갔던 환희의 순간만 떠오를 뿐이다. 나는 빙판으로 변한 바위를 붙잡고 일어나 심호흡을 가다듬고 넥스트 주법으로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겼다.

“경태야, 넘어지면 많이 다쳐. 조심해야 돼.”
“어메, 미끄러워 어디다 발을 디뎌야할지 모르겠어. 음산한 기운마저 감도네.”
나는 에어컨 바람 같은 음산한 냉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와 함께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었다.

“야, 참 멋있고 아름답다!”
낙관이가 갑자기 탄성을 질렀다.
“낙관아, 뭐가?”
“경태야, 5 부 능선부터 설경이야. 정말 멋지다!”

나는 잠시 어릴 적 추억을 떠올려 보았다. 아침 일찍 마당에 나오면 수북이 쌓여있는 백설기보다도 더 하얀 눈을 밟으며 깡총깡총 뛰놀던 그 시절. 바둑이와 아무도 밟지 않는 온통 새하얀 세상을 내가 가장 먼저 밟는 황홀함과 희열을...

아! 그러나 지금은 그 아름답고 황홀했던 함박눈 쌓인 세상을 볼 수가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양 눈에서 눈물이 주루륵 흘러 내렸다. 나는 괜한 생각에 빠져 잠시 마음이 약해졌다. 환상통인가 보다.

“경태야, 소지봉이다.”
“우와, 이제 험로는 끝나고 비단길만 남았네. 하하하.”
최 원장의 사려 깊은 배려와 친절한 안내로 걱정했던 마의 벽을 고통 없이 순조롭게 통과 했다. 그 원동력은 내 페이스대로 인내하며 안내해준 최원장의 힘이다.

“갱태야, 찹쌀파이 묵으라. 그리고 이건 뭔가 알아 맞춰 봐라?”
최 경남지부장님은 접이식 의자를 펴서 나를 앉히고 찹쌀파이와 함께 단단한 무언가를 건네며 알아 맞춰 보라고 했다. 깨알 같은 점자를 읽는 내 손이 굵고 단단한 호두를 감지하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였다.

“예, 호두요.”
“귀신이네, 갱태 너 보인가. 하하하!”
우리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잠시 여유롭고 행복한 휴식시간을 즐겼다.

“경태야, 망바위다.”
라며 이중기 중앙여고 선생이 말을 건넸다.
“망바위...?”
“여기서 천왕봉을 볼 수 있다 해서 망바위래. 그런데 오늘은 운해가 잔뜩 끼어 천왕봉이 안 보인다.”
이 선생은 지리산 해설사보다 더 맛깔스럽고 전문적인 식견으로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실명 전, 마음이 울적할 때면 노고단에 자주 올랐다. 화엄사 경내를 가로질러 중재와 노고단으로 이어진 3시간 소요의 등산코스는 나에게 도전과 극복의 정신을 가르쳐준 스승이요 멘토였다.

때로 힘들고 때로 고통스러울 때 더 노력하고 더 인내하는 힘을 길러 준 곳이다. 모든 시름과 잡념을 잊고 노고단 정상에 올라서면 지리산 10 경 중 제2 경인 노고운해가 나타난다.

온몸을 싸하게 스치고 흐르는 운해를 바라보노라면 세파에 찌든 때도 온갖 시름도 한방에 확 달아난다. 그리고 뒤이어 찾아오는 성취의 희열감과 황홀감은 마치 구름을 타고 불의와 싸우며 종횡무진하는 손오공의 그것과 닮아있다.

망바위에서 바라본 천왕봉도 운무에 보였다 묻혔다 하겠지. 지금 나는 저곳을 향해 고통과 인내하며 가고 있다.

산행이 다시 시작되었다.
“경태야, 발 조심해, 양쪽으로 날카로운 바위야. 바위가 얼었어. 조심하고.”
최 원장은 10 센티미터 정도 쌓인 눈길을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최 교수는 설경에 탄복했는지 산행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 선생 역시 주위의 풍경들을 내게 일러주느라고 바빴다.
“경태야, 저 앞에 눈을 뒤집어 쓴 반야봉이 아름답게 보인다.”
이 선생이 또 나의 옛추억을 끄집어냈다.

고2 때 학우 2 명과 뱀사골을 경유하여 반야봉에서 폭우를 만나 산악구조대가 구출해준 악몽이 떠오른 것이다. 지리산 10 경 중 3경인 반야낙조, 해발 1,732미터의 지리산 제 2봉인 반야봉은 멀리서 바라보면 여자의 엉덩이같이 보인다는 봉우리이자, 노고단에서 바라보면 마치 여인의 젖가슴처럼 봉긋 솟아있는 봉우리다.

반야봉은 사방이 절벽지대로 고산식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반야봉에 오르는 기쁨은 낙조의 장관에서 찾는다. 여름날 해거름에 반야봉 정상에 올라 바라보는 서쪽하늘의 황홀한 낙조는 아마도 자연이 인간을 위해 베푸는 시시각각의 축제 중에서도 가장 경건하고 가장 의미심장한 축제가 아닐까?

때로는 구름바다를 검붉게 물들이며, 때로는 마지막 정염을 불사르는 선홍의 알몸으로 서서히 스러지는 태양과 마주하는 순간, 사람들은 아득히 먼 시원의 날에 시작된 한 편의 장엄한 드라마가 끝난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나는 이 선생의 ‘반야봉이다’는 환희의 메시지에 취하고 추억의 향수병에 취해 또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추억의 눈물샘을 자극시켜준 중기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윽고 산장에 도착했다. 코끝으로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겨울 산의 정취를 만끽하고픈 수많은 산 애호가들의 패기 넘치는 음성을 듣고 있노라니 나도 덩달아 힘과 기백이 용솟음치는 듯 했다.

“점심은 천왕봉 찍고 와서 묵는다.”
맏형인 최 지부장님의 단호하고 짧은 어조로 말했다. 이에 군말없이 동의하는 우리는 어느새 한몸 한뜻으로 똘똘 뭉쳐진 불사조가 되어 있었다.

“경태씨, 아~해.”
냉골보다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부는 산장의자에 앉아 있는데 정재은 누나가 꿀맛 같은 제과점 크림빵을 입에 넣어줬다.
“야, 크림빵 맛 죽여주네요! 재은 누나, 고맙심데이!”

사실 나는 허기지고 몸이 피곤하여 만사가 귀찮았다. 심지어 장갑을 벗는 것조차도 귀찮았다. 노출부위가 금방 동상에 걸릴 정도의 칼바람이 쌩쌩 불고 있으니 장갑을 벗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재은 누님은 내 게으른 심정을 간파했는지 장갑 벗기의 수고로움을 대신해 준 것이다. 산 애호가들의 태평양보다 넓은 넉넉한 마음과 지칠 줄 모르는 헌신과 배려의 정신에 다시 한 번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장터목 산장은 예전에 장이 선 장터라고 했다. 이 높고 험한 곳에 무슨 장이 섰을까 생각하니 옛 조상님들의 불굴의 투지와 의지력에 감탄할 뿐이다.

잠깐의 크림빵 맛 같은 휴식을 뒤로 하고 산행을 다시 재개했다.
“경태야, 가파른 바위계단이야. 미끄럽다. 조심해야 돼.”
우리는 해발 1.806 미터 제석봉을 향해 몸마저 날려버릴 태세인 거친 강풍을 뚫고 가파른 빙판바위를 한발 한발 올라갔다.

“야, 설경 참 환상적이다! 그래서 산에 오는가 보다.”
최낙관 교수가 설경에 넋을 잃은 듯 했다.
“낙관아, 잘 왔지? 덜 깬 술 핑계 대고 백무동 산장의 따끈한 온돌방에 배 깔고 있었다면 이 황홀한 희열을 느낄 수 있었겠니? 하하하.”

나는 천왕봉을 처음 간다는 최 교수와 제석봉 정상에서 설원에 뒤덮인 대자연의 아름다운 서사시를 담아내기 위해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경태야, 반야봉과 천왕봉이 눈앞에 보인다.”
“중기야, 주변에 고사목 많지 않니?”
“고사목 지대를 막 지나가고 있어.”

30 년 전, 산불로 폐허가 된 곳, 산불진화가 덜 끝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던 곳, 주변에 은빛색의 고목들이 쓰러져 있던 곳, 쌩쌩 부는 바람은 마치 6.25 사변의 참혹한 총성처럼 들려왔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산하에 형제끼리 피비린내 나는 결투를 펼칠 만큼 절실한 전쟁이었을까. 영령들이여 고이 잠드소서. 나는 호국영령과 빨치산 전투에서 산하하신 무고한 영령들을 위해 잠시 고개를 숙였다.

“경태야, 가파른 바위야. 미끄러워. 조심해.”
“야, 배도 고프고 정말 힘들다. 아직 멀었어?”
“조금만 가면 돼.”
“지금도 통천문을 통과해야 천왕봉을 밟을 수 있어?”
“으응.”

나의 기억 속에 지금 지나고 있는 이곳은 한시도 긴장모드를 풀 수 없는 위험지역이었다. 나는 빙판길을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아이젠을 착용했지만 바위빙판이라 착지가 불안정해 자주 미끄러져 넘어지기 일쑤였다.

“경태야, 우람한 고사목이 서 있는 곳인데 애국가 영상화면에 등장하는 명소야.”
나는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부르며 극장에서 보았던 애국가 영상 장면들을 떠올려 보았다.

설악산 흔들바위와 낙산사 의상대에서 바라본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동해바다 일출장면, 그리고 지리산과 설악산 오색단풍장면 등을 떠올리자 또 환상통이 찾아왔다. 벌써 몇 번 째 눈물샘이 자극되었는지 모른다. 이젠 눈물샘도 말랐는지 마른 눈물만 흐른다.

“경태야, 위험해 고개 숙여.”
갑자기 최 원장이 긴급 전령을 보냈다.
“왜?”
“통천문을 통과해야 해.”
따라 오던 중기가 한마디 거든다.
“경태야, 한번 받아볼래? 하하하.”
나는 이렇게 응수했다.
“아니. 통천문 무너지면 나 책임 안 져. 하하하.”

하늘로 통한다고 해서 통천문이라 이름 붙여진 문. 겨우 사람 한명 통과할 수 있는 신성한 문. 예전엔 없던 철구조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경태야, 70 미터 전방이 정상이다. 조금만 힘내자.”
“야, 정말 힘들다. 이건 완전 유격훈련도 아니고...”
집채 만 한 눈 덮인 바위를 철제난간이나 로프를 타고 올라갔다.

3 년 전, 칠레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대회에서 막내아들과 첫날 첫 구간을 달릴 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악마의 소굴로 지칭되는 악명 높은 주최측인 ‘레이싱 더 플리닛’은 ‘포기할 사람은 고생 말고 빨리 포기하라’는 함의를 담고 첫날의 코스를 아주 높은 난이도로 만들곤 했다.

그때 정말 힘들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이 펼쳐진 망망 사막에 우리 부자만 외톨이가 되어 마치 대양에 떠있는 나뭇잎처럼 거센 풍랑에 흔들리는 것처럼 빌딩 숲같은 바위를 위태위태하게 기어 오르고 내려가며 달려야 했던 그 아찔했던 추억들...

그에 비해 안전한 땅,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우리 조국에서 늠름하고 체력 건장한 전문산악인 친구 세 명이 떡 버티고 서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뭐가 무섭고 위험한가. 자, 힘내자. 몇 십 미터만 가면 정상이라지 않는가. 나는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온몸에 무엇인가가 용솟음치고 있는듯 했다. 설레임과 긴장감도 더해졌다.

나는 11년 전, 지금은 용인에버랜드에 묻혀있는 안내견 찬미와 함께 kbs-tv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동계종주에 나섰었다.

12월 29일 노고단을 출발, 연하천 산장, 세석산장, 장터목 산장에서 각각 숙박하고 드디어 2001 년 1월 1일 새해 천왕일출을 맞이하기 위해 이곳에 서 있었다.

이른 새벽 동틀 무렵 해발 1,915미터의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에 올랐을 때, 끝없이 펼쳐진 회색 구름바다 저 멀리 동녘 하늘에 희뿌연 서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이것도 잠깐 동녘하늘이 오렌지 빛으로 물들면서 휘황찬란한 오색구름 속에서 진홍빛 거대한 태양이 눈부신 햇살을 부채살 같이 뻗치며 불쑥 솟았다. 이 천왕봉 해돋이는 지리산 10경중 제1경으로, 이 일출을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은 삼대에 걸쳐 적선을 해야 된다는 속설도 있다.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환희의 추억을 떠올리며 정상비를 향해 한발 한발 내딛었다. 몸조차 가눌수 없을 정도로 쌩쌩 불던 강풍이 잠자고 장엄한 분위기가 온몸에 전해져 올 때 천상에서 축복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경태야, 드디어 정상이다. 고생했다. 정말 고생했어!”
“그래! 고마워! 너희들 덕분에 또 정상에 설수 있었어! 친구들아, 화이팅!”
11 년 만에 11 번째 오른 천왕봉. 우리의 감격을 축복이라도 해주는 듯 하늘도 웃고 바람도 잠자고 춥지도 않았다.

나는 또 두 개의 벽돌을 탄생시켰다. 장애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로 재활자립에 걸림돌이 되는 차별의 벽돌을 하나 내려놓았고, 우리는 더불어 함께 살아야할 운명공동체임을 자각하는 사랑과 희망의 공동체 벽돌을 하나 더 올려놓았다.

천왕봉은 성역이 없었다. 다만 도전하는 자, 꿈을 가진 자에게만 기회가 주어진다는 교훈을 얻고 간다. 장장 10시간동안 등산안내를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맡아준 최병선 원장님, 최낙관 교수님, 이중기 선생님, 그리고 천사의 마음으로 배려와 나눔과 고통을 같이 해준 최재일 경남지부장님, 정재은 누님, 정현수 대원님, 안병철 대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달리는 희망제조기 송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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