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권의 동학농민혁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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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권의 동학농민혁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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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6.26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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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권의 동학농민혁명

전주는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전라도의 감영이 있던 곳이며 풍패지향(豊沛之鄕 : 건국자의 고향)으로써,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보관하였던 경기전과, 시조 및 시조비의 위패를 봉사한 조경묘가 있는 영지(靈地)이었다. 따라서 전주는 정부와 농민군 모두에게 상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전주는 사발통문 모의 때부터 농민군의 핵심 공격 대상이었고, 동학농민혁명의 시작과 함께 관군의 거점이자 농민군의 1차 점령 목표지이었다. 이것이 전주가 동학농민혁명의 중심무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또한 전주는 농민군 최대의 승리인 전주성 점령, 관군과 농민군 사이의 격전인 완산전투, 양자 타협의 산물인 전주화약, 그리고 그 성과라 할 수 있는 농민군 집강소체제의 본부인 전주대도소 설치, 재봉기를 위한 농민군의 집결과 해산 직전의 최종 집결 등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에서 주요사건들이 이곳을 무대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전주는 농민혁명을 통해 체제 변혁을 이루려는 동학농민군과 이를 막으려는 정부 모두에게 상징적 장소이었고, 그에 걸맞게 진퇴의 공방이 이루어진 격전의 심장부이었다.
현재 전주권에는 동학농민군이 전주에 입성하였음을 기념하는 전주입성비, 농민군 전주입성 진격로였던 풍남문과 서문 터, 전주집강소 자리였던 선화당 터, 농민군 지도자 김개남의 처형지이었던 초록바위, 삼례집회 및 2차 농민군 집결지였던 삼례역참 터, 그리고 농민군 최후 전투지인 대둔산 전투지 등 동학농민혁명관련 유적지가 남아있다.

삼례역참 터 (삼례집회)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 1170-13 삼례동부교회


1880년대 중엽 이후 충청,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교도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이 일대 각 고을의 수령과 아전들이 조정에서 동학을 금지하는 것을 빙자하여 교도의 재산을 다투어 수탈하였다. 동학교도는 이 같은 수탈에 대해 속전(贖錢:일종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거나 체포를 피해 달아나는 등 소극적인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동학교도는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확장된 교세를 바탕으로 이른바 교조신원운동이라고 불리는 동학 공인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892년 10월 공주에서 시작된 교조신원운동은 같은 해 10월 27일 삼례에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하면서 전라도에서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1월 1일 전라도 각지로부터 모여든 동학교도 1천여명은 삼례역에서 교조 최제우의 신원과 동학교도에 대한 수탈 중지 등을 요구하였다. 동학교도는 전라감사로부터 어떠한 확답도 받지 못한 채, 대신 동학을 금한다는 미명 아래 자행된 재물수탈 금지의 지시를 각 읍에 내려받는데 성공하였다.
삼례에 모였던 동학교도는 이후 11월 말까지 관(官)은 물론이고 교단의 해산 명령도 따르지 않는 가운데 복합상소와 같은 적극적인 대책 수립을 요구하였다. 이같은 강경한 움직임은 다른 지역의 상황과 차별되는 독특한 것으로 인정되었다.한편, 1894년 9월 2차 농민봉기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완산전투 (완산칠봉)
전주시 완산구 완산동


동학농민군을 뒤따랐던 홍계훈 군대는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한 다음 날 용머리고개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완산, 다가산, 사직단, 유연대 등 주변 산과 골짜기를 연결하여 진을 치고 포열을 정비하는 한편, 완산칠봉 남쪽 구릉에 지휘본부를 설치하였다.
이때부터 동학농민군과 홍계훈의 경군은 전주성을 두고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5월 1일 동학농민군은 남문으로 나아가 군대를 남북 2대로 나누어 완산칠봉의 경군을 목표로 돌진하였다. 남쪽 1대는 남고천을 건너 곤지산 서쪽 벼랑의 골짜기를 공격하였고, 북쪽 1대는 위봉에 올라가 매곡(梅谷)을 사이에 두고 경군과 싸웠다. 5월 2일 경군은 농민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하지는 않았으나, 완산에 설치된 야포와 기관총으로 전주성을 향해 무차별 사격하였다. 그러나 포탄은 성안에 닿지 않고 서문과 남문 밖의 민가에 쏟아졌다. 5월 3일 전투는 경군과 농민군 쌍방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루었다. 전봉준은 농민군을 직접 이끌고 북문과 서문으로 나섰으며, 이날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앞장 선 소년 장사 이복룡이 전사하였고 전봉준도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으며, 경군 역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처럼 전주성을 중심으로 동학농민군과 홍계훈의 경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주고받을 즈음, 조정에서는 청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청의 군대가 5월 5일과 7일 아산만에 상륙하자, 일본 역시 5월 5일 대본영을 편성하여 5월 6일 인천항에 선발대를 상륙시켰다.
청과 일본군의 조선 상륙 소식은 전주성의 농민군에게도 알려졌다. 전봉준은 조선을 중심으로 한 정국 변화를 타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패정개혁을 실시한다는 조건이 수용되자 5월 7일 전주화약을 맺었다.

 

풍남문보물 308호 /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풍남문은 현재 전주성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문이다. 동학농민군은 전주성 입성 당시 풍남문과 서문을 통해 들어왔다.

<출처:동학농민혁명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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