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권의 동학농민혁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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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권의 동학농민혁명3
  • 투데이안
  • 승인 2009.06.3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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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봉기 역사광장

완주군 삼례읍 신금리
삼례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서울로 통하는 역참이 있던 곳으로 교통이 편리하여 숙박이 쉬웠기 때문에 동학농민군의 집결지로 선택되었다. 역참터에 있던 수십기의 공덕비는 완주군 삼례읍 신금리에 조성된 삼례봉기 역사광장에 옮겨져 있다. 이들 비석 가운데에는 동학농민군을 잔인하게 다룬 전라감사 이도재의 영세불망비도 있다.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기념비 .

완주군 삼례읍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기념비는 전주에서 삼례로 향하는 국도에서 삼례로 들어가는 입구 천변에 세워져 있다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기념비는 전주에서 삼례로 향하는 국도에서 삼례로 들어가는 입구 천변에 세워져 있다

 

 

사자암

익산시 금마면 신룡리 미륵산
1880년대 중엽 이후 동학교단은 오랜 동안의 지하포교시대를 마감하고 호남의 평야지대로 진출하여 조직적으로 포교에 나섰다. 최시형은 1884년 6월경에 익산 미륵산에 있는 사자암에서 약 4개월동안 머물며 익산, 전주, 여산, 고산, 삼례 등지의 동학교도에게 포교하였다. 이것은 교조 최제우가 1860년대 초에 남원 교룡산성 내의 은적암에서 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은 이래, 줄곧 불교계와 상호교류 속에 교세를 확장했음을 보여준다

1880년대 중엽 이후 동학교단은 오랜 동안의 지하포교시대를 마감하고 호남의 평야지대로 진출하여 조직적으로 포교에 나섰다. 최시형은 1884년 6월경에 익산 미륵산에 있는 사자암에서 약 4개월동안 머물며 익산, 전주, 여산, 고산, 삼례 등지의 동학교도에게 포교하였다. 이것은 교조 최제우가 1860년대 초에 남원 교룡산성 내의 은적암에서 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은 이래, 줄곧 불교계와 상호교류 속에 교세를 확장했음을 보여준다

대둔산전투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산 15
대둔산전투는 현재까지 알려진 농민군 최후의 전투이다. 1895년 2월 17일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저항하였으나, 25명의 동학농민군은 전원 몰살당하였다. 이날 이후 전라도 일대의 일본군과 관군은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대둔산전투는 현재까지 알려진 농민군 최후의 전투이다. 1895년 2월 17일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저항하였으나, 25명의 동학농민군은 전원 몰살당하였다. 이날 이후 전라도 일대의 일본군과 관군은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출처:동학농민혁명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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