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겨운 라면의 역사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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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겨운 라면의 역사를 아시나요
  • 허성배 칼럼니스트
  • 승인 2013.05.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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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9월 15일은 인천상륙작전 일이자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인스턴트 라면“이 첫선을 보인날로 한국사람 모두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날이다.
  6. 25 전쟁에서 북한에 밀리던 한국군과 UN군이 극적인 북진 기회를 잡은 인천 상륙작전으로 수복은 했지만 전쟁의 상혼이 채 가시지 않아 한국사람들 모두가 힘들게 살아가던 1961년 어느날. 삼양식품(三養食品) 당시 전중윤사장은 우연히 서울 남대문 시장을 지나다 배고픈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 죽을 사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절박한 모습을 보았다.

 당시“치킨라면”하면 한국사람 누구나 먹어봤고 저마다 추억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풍요의 시대를 살고있는 요즘 젊은 세대들은 꿀꿀이 죽의 눈물겨운 애환(哀歡)을 모른다. 그때 전사장은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저 사람들 에게 싸고 배부른 음식을 먹게 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 끝에 전 사장은 일본에서 라면을 제조하는 기술과 시설을 어떻게 해서든지 들여와야 겠다는 결심을 굳쳤다. 하지만 외화가 없을 뿐 아니라 일본과는 국교가 단절됐던 때라 라면을 제조하는 시설을 일본에서 들여오기란 하늘에 별따기 였다.
 정부가 가진 달러를 민간이 원화로 사던 시절. 한 라인에 6만 달러나 하는 라면 제조시설을 수입하기엔 전사장도 달러가 턱없이 부족했고 당시 가난한 정부역시 옹색하긴 마찬가지 였다.
 속담에 궁하면 통한다는 진리처럼 전 사장은 큰맘먹고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JP)씨를 찾아갔다. “국민들 배 곯리지 맙시다”라는 전 사장의 간곡한 호소에 감동한 당시 나는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세도를 가진 JP는 반갑게 전사장을 맞으며 마침 농림부가 비상용으로 보유하고 있던 외화 10만 달러 중 5만 달러를 긴급히 주선하여 라면 제조시설을 도입하는데 쓰이도록 전 사장에게 흥쾌히 도와 주었다고 한다.
 그때를 계기로 두 사람의 나라를 위한 우정은 그 이후에도 오랜 세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신용장을 열고 전 사장은 곧장 일본으로 갔지만 일본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 일본도 어렵던 시절. 라면 제조시설을 국교도 없는 한국에 선뜻 팔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여러 곳을 수소문 끝에 전 사장은 묘조 (明星)식품의 오쿠이(奧井)사장을 여러 통로로 극적으로 직접만나 한국의 어려운 식량 사정을 이야기하며 도와달라고 간청 했다고 한다.
  다음날 대답을 들으러 다시 찾은 전 사장에게 오쿠이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 이야기(愛國心)를 듣고 많이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 가 본 적이 없고 아직 국교 정상화도 안됐지만 한국 전쟁이 일본 경제를 재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당신들은 불행했지만 우리는 한국전쟁 덕분에 잘살아 가고 있다. 내가 민간 베이스로 기술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시설도 싼 가격으로 제공하겠다.”
 오쿠이 사장은 전 사장의 끈질긴 애국심에 감화되어 한 라인에 6만 달러 라던 라면 제조 시설을 두 라인에 2만 5,000달러로 즉석에서 발주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면(麵)과 수프(SOUP)의 배합에 관한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일본 현지에서 안간힘을 다했지만 일본인 기술자들은 끝내 면과 수프의 배합 비율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전 사장이 끝내 배합비율을 못 배우고 허탈한 심정으로 서울로 돌아오는 날. 오쿠이 사장은 비서실장을 시켜 공항에서 봉투 하나를 전 사장에게 전해 주었다. 비행기 안에서 뜯어보라는 그 봉투 속에는 기술자들이 펄펄 뛰며 비밀로 했던 면과 수프의 배합 비율(라면 제조의 일급비법)이 적혀 있었다.
 가난하고 굶주렸던 국민들의 배를 채워줬던 라면은 이렇게 전회장의 눈물겨운 역사적인 사연을 않고 1963년 9월 15일 삼양 “치킨라면” 이란 이름으로 태어남으로써 당시 김종필(金鍾泌.JP)전 국무총리의 애국심은 말할 것도 없고 전중윤 (全仲潤) 회장 이야말로 기업가이기 이전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혼신을 다한 이들의 애국심에 대하여 전국민의 이름으로 찬사를 보내야 할 것이다.
  그 당시 라면 한봉지 가격이 10원. 식당에서 김치찌개나 된장찌개가 30원이고 커피 한 잔이 35원이던 시절이니 저렴한 가격으로 어려운 서민들에게 원가에도 못미치는 가격으로 헌신 봉사한 것이 분명하다.
 그이후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이 차츰 나아지면서 어렵던 시절. 허기진 배를 채워줬던 “제2의쌀” 이기도 했던 라면이 이젠 “인스턴트 식품” 이란 이름으로 구박받는 처지가 됐다. 6.25의 결정적 전기를 마련했던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과 함께 국민들의 배를 채워 준 라면이 선보인 9월15일은 풍요로운 오늘. 다시한번 우리 스스로를 깊이 되돌아보고 오래토록 기억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한편 굼주리던 어려운 시절에 우리 국민들의 배를 채워줬던 역사적이고 애국적인 삼양라면을 과당 경쟁으로 인한 터무니 없는 허위 날조된 모략 중상(우지사건)으로 소비자들을 왜곡하게 하여 8년간 제조공장 문을 닫게 했으나 대법원의 최종 무혐의 판결이 남으로써 삼양라면은 그 치욕적인 오명을 깨끛이 씻게 되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기업에 이같은 엄청난 우를 범하고도 지금까지 해명 한마디없는 일부 계층의 어처구니 없는 이런행위(은혜를 망각한 背恩忘德)는 다시는 없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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