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김명곤 전문화관광부장관의 '동편제'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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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김명곤 전문화관광부장관의 '동편제' 기행
  • 엄범희 기자
  • 승인 2010.02.12 0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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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곤 전 문화관광부장관(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의 블러그 '김명곤의 세상이야기'에 올려진 '지리산 동편제 소리여행 다녀왔어요'제목의 글을 그대로 올립니다.

김 전장관은 영화 '서편제'를 통해 대한민국에 널리 알려진 연화배우이자 연예인, 정치행정가 등 수많은 닉네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블러그를 통해 언론사 초청 강의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계십니다. 전북연합신문 로고가 들어있는 사진과  일부 사진은 편집자에 의해 편집됐습니다./편집자주
 


제목: "지리산 '동편제' 소리여행 다녀왔어요"

지리산 뱀사골이 있는 산내면 면사무소에 김용근이란 공무원이 계십니다.

그의 부친은 평생 농사를 지은 농부였는데, 공무원이 된 아들에게 절대 7급 이상의 고위공무원이 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고위 관료가 되면 서민들을 괴롭히게 되니 하위 관료로서 서민들에게 봉사하며 사는 게 옳은 길이라고 하셨답니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들어 20여 년간 고향인 산내면에서 봉사하며 현재 7급 공무원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부친도 훌륭하지만 그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 온 아드님도 훌륭합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도 못 말린 한 가지 병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의 '판소리병'이었습니다. 그는 지리산 부근에서 전승되어 오는 동편제 판소리에 '미쳐서' 지금까지 판소리 명창들의 유적을 탐방하고 자료 조사를 하는 데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기록도 거의 없고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전국을 떠도는 통에 가족관계도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명창들의 삶을 기록한다는 것은 정말 지난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토지대장이나 호적 등을 조사하고, 명창과 관련된 모든 곳을 직접 답사하고, 생존자나 관련자들의 증언을 채록하고, 그들의 삶의 흔적을 직접 체험해 보기도 하며 오랫동안 고독한 조사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3년 전 미당 서정주 시인의 조카이며 시인인 이주리님과 남원에서 만나 서로 뜻이 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함께 유적지를 돌아다니고 자료 조사를 하며 언젠가 지리산 판소리 명창들의 이야기를 대하소설로 엮어 낼 꿈을 꾸고 있습니다.

저는 전북 지역 인터넷 신문인 <전북연합신문>의 대표 엄범희님의 소개로 두 분을 만난 뒤로 그들이 조사했던 자료와 아직 발표되지 않은 귀한 글들을 볼 수 있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들의 판소리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대하소설에 대한 집념과 꿈은 저를 부끄럽게 할 정도였습니다.

함께 소릿길 탐방을 할 기회를 바라던 우리는 어렵게 일정을 맞춘 끝에 드디어 1박 2일의 '지리산 소릿길' 탐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전주에서 소리축제의 회의를 마친 저는 점심 후에 남원으로 향했습니다. 약속 장소인 광한루 주차장에 당도하니 두 분과 함께 글로벌 농촌 인재협회 사무처장인 박찬용님이 봉고를 운전하며 우리 일행을 안내해주시더군요. 

 


우리는 남원에서 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로 향했습니다.

비전마을은 옛날부터 전라도와 경상도가 통하는 중요한 통로여서 주막과 객주집이 많았고 풍광이 아름다워 찾는 이가 많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인근에는 거문고의 전설적 명인인 옥보고가 살았다는 옥계동, 해발 695미터의 바위산인 황산, 구룡폭포 등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비전마을 가까운 곳에 있는 남쪽 구릉에는 이성계가 왜군을 무찌른 전투를 기념하는 '황산대첩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비전마을에 있는 '송흥록 명창의 생가'를 찾았습니다. 아래 동상의 주인공이기도 한 송흥록 명창은 '가왕(歌王)'이라 불리기도 하는 전설적인 명창입니다. (*그의 자화상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동상의 모습은 '상상 속의 그대'입니다.)

앉아서 북을 치는 이는 송흥록 명창의 동생인 송광록으로 형의 고수로 따라다니다가 나중에 명창이 되었습니다. 송흥록의 판소리는 아들 송우룡, 송우룡의 아들 송만갑으로 3대에 걸쳐서 집안으로 전수되었습니다. 속가 제자인 박만순, 양학천, 김정문, 유성준 등도 당대를 울린 대명창들입니다. 이처럼 송흥록의 집안은 동편제 판소리의 명가이며 종가입니다.

판소리는 송흥록 명창을 기점으로 일대 전기를 맞게 됩니다. 송흥록 이전의 판소리는 지역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선율과 장단으로 불렀는데 송흥록에 의해 통합되어 오늘날의 판소리 형태로 정착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송흥록을 '판소리의 중시조'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송흥록 명창의 생가와 나란히 저의 스승인 '박초월 명창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스승이 돌아가신 뒤 10여 년 전에 다녀 간 기억이 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스승의 탄생과 집안 내력에 대해 김용근님을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는 방문이 되었습니다. 박초월 명창에 대해서는 저의 글 <나의 스승 박초월 명창 생각하니 눈물난다>http://dreamnet21.tistory.com/10을 참고하시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비전마을을 떠난 우리는 운봉읍 화수리에 있는 '국악의 성지'를 찾았습니다.

국악선인묘역, 납골묘, 사당, 전시체험관 등을 갖추고 2007년 10월에 개관한 국악의 성지에는 옥보고 명인이나 송흥록 명창 등 대표적인 국악인의 묘와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현대식 2층 한옥으로 세워진 전시체험관에는 국악과 관련된 많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 유독 저의 눈길을 끄는 낡은 공책이 있었습니다. 동편제 판소리를 오롯이 지켜 온 남원의 소리스승 강도근 명창이 제자들의 수업료 납부 상황을 적어 놓은 공책입니다.

전형적인 옛서체로 정성스럽게 적어 놓은 그의 꼼꼼한 성격이 보이는군요. 그 분은 평생토록 남원국악원에서 안숙선, 이난초, 전인삼 명창을 비롯한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냈습니다.

국악의 성지에서 참배를 마친 우리는 인월면 성산리에 있는 '흥보마을'로 갔습니다.

판소리 <흥보가> 중의 첫가사로 '옛날 경상-전라 두 얼품에 놀보 흥보가 살았는데 놀보는 형이요, 흥보는 아우였다'로 시작되는 바로 그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뒷산의 '연비산(제비가 날아오른 산)'이라든가, '까막고개'나 '화초장 다리'와 같이 흥보가에 나오는 지명들이 전해지고 있어 1993년에 흥보마을로 지정됐습니다. 하지만 흥보가 실제로 그 마을에 살았는지, 그리고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니고 생존인물인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어서 산내면 백장마을에 있는 '변강쇠 공원'을 들렀습니다.

 


판소리 <변강쇠가>에 나오는 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전해오는 이 마을에는 남근을 상징하는 '근원바위'나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아들을 낳았다는 '수태바위', '남근목', '강쇠바위' 등 변강쇠 관련 지명이 있어 2000년부터 변강쇠 공원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경상도 쪽 함양에도 변강쇠 마을이 있다는데 어느 마을이 '원조'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울 듯 싶습니다. 공원에 세워진 현대식 조각상이 재미있더군요.

배가 고파진 우리는 저녁 노을이 아름답게 번지는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은 <귀거래사> 식당에 들렀습니다. 중국의 전원시인 도연명의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전원이 무성하니 나 돌아가리라'하는 싯귀가 떠오르는 고즈녁한 집이더군요.

정말 정갈하고 맛있는 산채 정식이었습니다. '뱀사골'이라는 인상적인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산내면은 사과와 흑돼지와 곳감의 산지이며 수많은 약초와 산채들의 보고입니다.

어둠이 내리자 우리 일행은 산내면 상황리에 있는 <노고지리> 산장에서 여장을 풀었습니다.

 


올해 지리산에서 처음 받아 낸 '고로쇠물'과 주인 아저씨가 직접 담갔다는 '양귀비술'을 마시며 우리는 밤새도록 판소리와 예술과 전통문화와 농촌문화의 현실과 꿈에 대한 정담을 나누었습니다.

산공기의 상쾌함을 느끼며 새벽에 일어나 찍은 산장과 주변 지리산의 모습이 신비롭군요.

방마다 '꽃의 향기는 천리를 가고 정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花香千里 人情萬里)'라는 글귀를 나무에 조각을 해서 걸어 놓은 주인 아저씨는 소도시의 시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에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진도개와 아침 산책을 나온 그의 얼굴이 지리산을 닮아 넉넉하고 푸근합니다.

밤에 차를 타고 달려 온 엄범희님까지 합세해서 일행이 늘었습니다. 소릿길 탐방을 할 명창들의 유적지는 많이 남아 있지만, 오전밖에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2차 탐방을 하기로 한 우리는 부근에 있는 '한지 장인'과 바위굴을 뚫어 법당을 만든 '서암정사'를 찾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차가운 고원의 공기를 마시며 산내면 하황리에 있는 '한지 장인 신평식'님의 한지 공장에 들렀습니다.

공장이라기보다 움막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듯한 이곳에서 평생 한지를 만들어 온 그는 옛부터 내려 온 방법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전통한지의 명인입니다.

마을 뒷산 계곡에서 흐르는 이 맑은 물을 사용하여 한지를 만듭니다.

많은 한지 명인들이 양잿물이나 표백제나 기계식 공법을 도입하여 한지를 만드는 데 비해 그는 부친으로부터 전수 받은 옛방식을 조금도 고치지 않고 오롯이 전수해 오고 있습니다.

아직 인간문화재로 지정도 되지 않았다니 한 장 한 장 정성을 다해 만들어가는 그의 한지가 언젠가 그 맥이 끊어지지 않을지 걱정됩니다.

 


한지 명인과 아쉬운 작별을 한 우리는 경남 함양군 마천리 벽송사 입구의 <서암정사(瑞岩精舍)>로 향했습니다.

40여년 전에 지리산 심산유곡에 있는 <벽송사(碧松寺)>에서 수행을 하던 원공스님은 500미터쯤 떨어진 산속을 산책하던 중, 갖가지 바위들이 신비스럽고 상서로운 기운으로 늘어서 있고 장엄하게 솟은 앞산 연화봉이 연꽃처럼 펼쳐진 풍광에 넋을 잃고 서서 그곳에 불사를 일으키겠다는 원을 세우게 됩니다.

 


1975년에 터를 고르기 시작해 공사를 시작했지만 토지의 소유권 문제, 국립공원의 건축 허가 문제, 공사 자금 조달의 문제 등의 수많은 어려움 때문에 불사는 하염없이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백송사의 젊은 주지로 불같은 추진력과 깊은 불심을 지닌 법인스님이 부임해 오면서부터 불사는 빠르게 진척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불사 중에서 가장 힘들고 놀라운 불사는 '석굴법당'이었습니다.

 


거대한 바위를 뚫어서 법당을 짓고, 사면의 벽과 천장 전체를 그림과 글씨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원공 스님의 디자인을 토대로 하여 석공들이 조각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6명의 석공이 1989년부터 조각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 하나 둘 떠나고 나중에는 홍덕희 석공만이 10년 이상 절에 머물면서 2001년에 완성했다는 이 석굴은 국내에서 가장 거대하고 예술적으로도 뛰어난 석굴입니다.

석굴법당의 본존불인 아마타불의 미소가 불국사의 석굴암 부처님처럼 정겹습니다.

제 생각에 이 석굴법당은 100년쯤 세월이 흐른 뒤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고도 남을 훌륭한 현대의 문화유산입니다.

 


두 스님의 놀라운 집념과 원력으로 지어진 불가사의한 이 도량은 불보살의 상서로운 기운이 충만한 곳입니다.

옥보고 명인, 송흥록 명창, 박초월 명창, 강도근 명창, 신평식 장인, 원공스님, 법인스님, 홍덕희 석공.....지리산 골짝골짝에 이런 분들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게 놀랍습니다.

또 이들을 사랑하고 지키고 있는 김용근님, 이주리님, 박찬용님, 엄범희님 등....
대한민국의 문화는 바로 이런 분들의 열정과 집념 어린 노력에 의해 지켜지고 발전되는 것 아닐까요?/김명곤 전 문화관광부장관(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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