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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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석탑
  • 문공주 기자
  • 승인 2012.08.2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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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

“미륵사지 석탑에 얽힌 추억이 있나요?”

소풍과 수학여행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미륵사지와 미륵사지 석탑. 오래된 앨범과 기억을 더듬어 보면 추억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지금은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지만, 지금보다 미륵사지 석탑은 훨씬 사람 가까이에 있었다.

지난해 가을 「고도(古都) 익산 옛 모습 사진 기록물 공모전」에서 금상을 차지한 양순목 씨의 <1949년 미륵사지 석탑에서 인간탑>이 있다. 미륵사지 석탑의 십자로 따라 걸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심주석을 잡고 돌며 기도했던 추억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국보 제11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규모 석탑이라고요?!’
미륵사지 석탑은 실물보다 국사교과서에서 처음 만나고 불에 덴 듯한 괴물 같은 실물을 직접 보고 적지 않은 실망을 한 사람도 더러 있다.

‘역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를 간직한 미륵사지 석탑의 그 진가를 알아보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오랜 세월 초연하고 당당하게 서있었던 이유는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 중 밝혀진다. “보여 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위대함에 견주어 보면”이라는 칼릴 지브란의 시처럼 미륵사지 석탑은 심중에 품은 금빛 사리장엄을 품고 있었다.

미륵사지 내에 있는 이 석탑은 미륵사지 서원(西院)에 자리하고 있으며, 국내에 남아 전하는 석탑으로는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탑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다. 미륵사지 석탑은 한국 탑파의 시원 석탑이며 고대 목조건축의 수법을 엿볼 수 있는 석탑이다. 또한, 건축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미술사, 고고학 등 여러 분야에서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일제강점기에 붕괴가 우려돼 시멘트로 보수하여 원형을 찾아보기가 힘들었지만 백제인들의 뛰어난 돌 다루는 솜씨를 알 수 있는 탑이다.

동양 최대의 석탑으로 알려진 이 탑은 본래 9층으로 건립되어 높이 26m가 넘을 것으로 추정되나 2001년 해체 전 서남쪽 부분은 무너지고 북동쪽 6층까지만 불안전하게 남아 있었다. 석탑 1층 내부에는 중심기둥이 가운데 세워져 있고 이를 기준으로 십자로가 있어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화강암을 사용하여 조성된 이 탑의 특징은 목조건물에서 공포(拱包)를 가설하였을 것이나, 이 탑에서는 목재와 같이 기교 있게 공포(拱包)를 조각할 수 없으므로 공포양식을 모방한 3단의 층급받침으로 지붕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은데 네 모퉁이가 가볍게 치켜들고 있어서 신라 석탑양식에서는 볼 수 없는 백제 특유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층 이상은 탑신(塔身)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가구 수법을 약화 시켰으며, 지붕돌은 폭만 줄여 1층과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5층 이상의 층급받침은 정단에서 4단으로 증가되었다. 그리고 각 기둥과 면석, 창방과 층급받침 등을 모두 별개석으로 엇물림 쌓기를 하고 있다.

미륵사지 석탑은 2001년 10월 6층 옥개석 해체를 시작으로 2009년 사리장엄 출토와 2010년 발굴조사까지 모두 완료되었다.

특히, 2009년 1월 14일 사리장엄 발견으로 미륵사 건립의 성격과 주체, 건립시기가 639년으로 밝혀져 출토유물의 편년에 절대연대가 확인됨으로써 당시 백제의 역사와 불교문화 연구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지난해 말 해체 전까지 남아있던 높이와 형태로, 즉 일부분만 복원하고 정비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현재 실시설계 중이며 2016년까지 복원될 전망이다./익산=문공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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