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은 죽어서 말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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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은 죽어서 말한다<1>
  • 안상현
  • 승인 2013.06.11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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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회 현충일이었던 지난 6월 6일 제게는 너무나 특별한 두 분의 천도제를 치르고 왔습니다. 바로 고모님 내외입니다.
두 분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며칠 전 중매로 혼인을 하였습니다. 한참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어느 날 전쟁은 터졌고 고모부는 징집을 당하여 화약내와 피비린내가 자욱한 전장(戰場)으로 떠나셔야 했지요.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랐고 누구보다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던 금슬 좋은 부부는 생이별을 앞두고 서로 굳은 약속을 하게 됩니다. 한 사람은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노라고, 다른 한 사람은 끝까지 변치 않고 기다리겠노라고. “조금만 기다리소. 내 금방 돌아올 터이니. 젊은 사람들 다 나가서 열심히 싸우는데 이 난리 금방 안끝나겠소?” “서방님! 걱정 말고 잘 다녀오셔요. 제 걱정은 마시구요.” 고모부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열심히 싸우고 또 싸웠습니다.

고모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매일 간절한 기도를 올리셨고 마치 고모부가 옆에 계신 냥 정성껏 지은 밥을 아랫목에 놓아두고 눈물로 곱게 다린 옷은 윗목에 놓고 살아가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모는 고모부의 전사통지서를 받게 됩니다. 너무나 상황이 급박한 나머지 퇴각하면서 시신을 거두지 못했다는 소식과 함께. 남편의 시신을 찾아와 모셔야한다는 일념으로 집을 나선 고모 역시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으로 허망하게 돌아가시고 맙니다. 이것이 제가 알고 있는 두 분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저는 20대 후반까지 고모님 내외의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족보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었을 뿐더러 두 분의 사연을 아는 분들은 모두 돌아가신 상태였으니 말입니다. 딸과 사위를 전쟁으로 졸지에 잃은 할아버지는 비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다가 이듬 해 역시 세상을 떠나셨는데, 시신을 찾지 못해 묘를 만들어주지 못하고 죽은 날짜를 몰라 제사 한번 지내주지 못한 미안함으로 고모님 내외와 관련된 얘기는 그 누구도 꺼내지 않기를 바라셨다고 합니다. 자연히 두 분의 슬픈 사연은 수십 년간 숨겨져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저는 신기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포탄을 맞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가는 젊은 청년과 넋을 잃은 채 산 속에서 흐느끼는 한 여인이 등장하는 꿈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 꿈은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현실 같은 생생함으로 놀라 깬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꿈을 꾸기 시작한 후로 몸 여기저기가 아프기 시작하고 크고 작은 사고를 여러 번 겪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제가 안쓰러웠는지 한 지인이 절이나 점집을 찾아가 문의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해주더군요. 종교는 없지만 지인의 조언대로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동하여 절과 점집을 찾아갔습니다. “조상 중에 나라 지키다가 젊어 돌아가신 분, 상사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돌아다니다 객사하신 분이 있습니다. 가엾은 두 분 꼭 천도해주세요.” 당시 고모님 내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저는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였고 후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국전쟁을 경험한 모든 친인척과 마을 어르신들을 수소문하여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 여쭤보았습니다. 그런데 웬 걸? 스님과 무속인의 말처럼 정말로 고모부는 군인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다 돌아가셨고 고모는 고무부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가셨다는 겁니다.  
얼마나 원통하고 한이 크셨으면 장조카의 꿈에 나타나셨을까하는 하는 안타까움과 두 분의 슬픈 인생을 까마득히 모르고 지내왔던 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교차되어 한동안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습니다.
나라와 가족을 위해 몸을 바쳤건만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현실이 고모부는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혼인한 지 한 달 만에 사랑하는 지아비를 잃은 고모의 심정은 얼마나 절절했으며 슬픔은 또 얼마나 컸을까? 너무나 부끄러운 후손이 되어버린 저는 부지런히 천도비용을 모았습니다.
고모부와 고모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보내드릴 수만 있다면 돈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오랜 준비 끝에 절과 굿당에서 각각 천도제를 올렸습니다. 오후에 시작한 천도제는 다음 날 동트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습니다.

안상현 법무부 광주교정청 전주교도소 교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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